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금의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한 사람들
영화 한 남자 / A Man / ある男 (2023)
줄거리, 티저, 원작소설, 자발적 실종, 결말, 리뷰, 해석
- 감독 : 이시카와 케이
- 러닝 : 122m
- 출연 :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 쿠보타 마사타카, 세이노 나나
줄거리
“지금부터 당신의 죽은 남편을 ‘X’라 부르겠습니다”
변호사 ‘키도’는 어느 날 의뢰인 ‘리에’로부터 그녀의 죽은 남편인 ‘다이스케’의 신원조사를 해달라는 기묘한 의뢰를 받는다. 사랑했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떠난 후,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다이스케’의 형 ‘쿄이치’가 찾아와 영정을 보고는 “이 사람은 ‘다이스케’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
한 순간에 정체가 묘연해진 남자 ‘X’. ‘키도’는 그의 거짓된 인생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진실에 다가설수록 충격적인 과거들이 드러나는데...
그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던 걸까?
한 남자 티저 예고편 / Official Trailer
원작소설 : 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
영화 <한 남자>는 데뷔작 <일식>으로 일본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소설인 <한 남자>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제70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다.
영화 내에서는 단어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영화의 주요 소재는‘신분세탁’으로 불리는 ‘죠하츠’라는 실제 사회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 때문인지 작품이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있을법도 하지만 수준 높은 필력으로 리듬감 있는 흐름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자발적 실종 / 죠하츠
죠하츠 じょうはつ (蒸発/증발) = 人間蒸発(인간증발) : 죠하츠는 증발이란 말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 내에서는 '자발적 실종'이라는 말로 해석하고 활용하고 있으며 60년대에 스스로 실종된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책과 영화에 소개된 그대로 새로운 신분을 받고 과거의 신분을 삭제하는 행위, 즉 ‘신분세탁’을 의미한다. 90년대 일본 버블 경제가 붕괴했을 때에는 ‘죠하츠’를 도와주는 전문업체나 브로커가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매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 비해 4배(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다고 전해진다.
자발적 실종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정폭력이나 이혼, 불화 등의 가정의 문제부터 실직, 파산이나 채무 등의 경제적인 이유, 범죄 등의 사회적인 이유로 인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수치심이나 모멸감, 대인공포 등으로 대안적인 삶을 택하는 경우다. 이들은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지인과의 모든 연락과 교류를 끊어버리고 돌연 종적을 감춘다.
결말(강스포주의)
여러 추적 끝에 리에와 가족을 이뤘던 X의 정체는 2번의 신분세탁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를 밝히고 난 뒤 변호사 키도는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한다. 키도는 아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우연히 그녀의 핸드폰을 통해 외도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곧 아내가 돌아오고 키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함께 식사를 한다.
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한 바에서 키도는 어느 중년의 남자손님과 대화를 나눈다.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일이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때 키도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조사했던 다이스케의 사건(온천 사업으로 인한 가정 불화와 리에와의 결혼 등)을 언급하며 그 또한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 듯한 암시를 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리뷰와 해석
이 영화는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초청작,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제46회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포함 8관왕을 차지한 화제작으로 제작단계부터 우수한 제작진과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만남, 혜성같이 문학계에 등단한 작가와 감독까지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요즘 개봉하는 영화들에 비해 리듬이 여리고 정적이면서도 느린 편이지만 몰입도가 좋고 전개가 매끄럽다. 그리고 강렬함이나 긴박함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는 마치 하마쿠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키워드는 아마도 ‘정체성’ 일 것이다. 특히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금의 나’라는 키워드에 주목해 볼 만하다.
- 작품 속 사건의 진위를 쫓는 변호사 키도는 재일교포다.
- X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범죄장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벗어나고자 하는 복서다.
- 다이스케는 가업으로 인한 집안의 세력다툼을 회피한 인물이다.
- 유토는 지속적으로 바뀌는 자신의 이름으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어느 한 사건자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보다는 위의 네 명과 그 주변인물들이 겪는 감정과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
1. 키도는 재일교포 변호사다. 이미 일본에서 낳고 자랐으며 국적이나 교육, 생활습관까지도 전부 일본인이다. 하지만 처가댁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암암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사회에서의 재일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은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들임을 보여준다. 키도는 X의 추적을 하면서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마치 자문처럼 다가와 자신의 현재의 삶을 되짚어보게 하는 촉발제가 된 듯하다.
2. 어린 시절 X는 집에서 아버지가 살해를 저지르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목격하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삶을 산다. 성장해 가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버지를 닮아있는 흔적들을 혐오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도구로서 복싱을 시작하였고, 후에 자발적 실종으로 작은 마을로 떠나며 그곳에서 리에를 만난다.
3. 다이스케의 형은 오만하고 서슴없이 말을 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리에와의 첫 만남, 그리고 키도와의 첫 만남에서 보여준 언사는 그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하게 한다. 반면에 다이스케는 마음이 여리고 내성적인 성향으로 형제와의 가업승계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 역시 자발적 증발을 통해 종적을 감춘다.
4. 유토는 어린 시절 부모님 결혼으로 한번, 그리고 이 혼으로 또 한 번의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후 리에의 재혼으로 다시 한 번 성을 바꾸게 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또다시 이름이 바뀔 상황에 놓인다.
X가 작은 마을의 시골로 거처를 옮겨 리에와 만나면서 하던 일은 임업(벌목꾼)이었다. 나무는 제재되어 가구가 되지만 그것을 가구로 불러야 할지, 나무로 불러야 할지는 보는 관점, 사용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또는 그들이 지금 어떤 상태이든 간에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인지하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사람들인지, 또는 내가 그들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마치 유토가 때가 되면 여동생에게 아버지의 상냥함과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리포트가 아닌 내가 느낀 대상에 대한 감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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